2년전, 미해병대에 4년간 근무하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기간을 거친 후 저는 포트 오 프린스에 있었습니다. 전역 장병과 의료진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며 그 도시에서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지역이었지요. 지진이 일어난지 사흘째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갈 예정이었어요.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에서 3주를 보낸 후, 우리는 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 군 전역 장병들이 재해에 엄청나게 잘 대응하더라는 겁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저와 제 동업자는 그걸 보면서 말했죠. "두가지 문제가 있어. 첫 번째 문제는 재해 대응에 불충분하다는 것인데. 너무 느리고 구식이야. 최신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최고의 요원을 쓰는 것도 아니었어." 저희가 알게 된 두 번째 문제는 전역자들이 통합성도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었죠. 여기 이게 토픽이었어요. 여기 이건 뉴스 첫 페이지구요. 저들 전역 장병들은 지금 집으로 돌아오고 있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는겁니다. 저들은 민간인의 삶에 재적응하느라 애씁니다. 우리는 거기 앉아서 이 두가지 문제점들을 짚어봤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 두가지는 문제점이 아니라 사실 해결책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구요? 우리는 재해 대응을 집으로 돌아온 전역 장볍들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최근의 조사를 보면 전역 장병의 92%가 군복을 벗을 때에도 사회에 공헌하고 싶어했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재해에 더 잘 대응하기 위해서 그들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잘 나타내는 저희 루비콘이라는 단체는 2010년에 탄생했습니다. 저희는 칠레의 쓰나미와 파키스탄의 홍수에 대응했습니다. 교육 훈련 팀을 타이-버마 국경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수단의 독립 직후에 그곳에 가서 의사를 교육하고 수술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올 해 초였어요. 저희 창립 회원중 한 사람이 우리 단체의 방향을 바꾸게 했지요. 이 친구가 클레이 헌트에요. 클레이는 저와 함께 해병대원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함께 근무했습니다. 저희는 2008년에 헬만드 계곡에서 같은 저격팀에서 근무했어요. 그는 포트 오 스린스에 함께 있었고 칠레에도 함께 갔었습니다. 올해 초, 3월에 클레이가 자살했습니다. 그건 비극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저희 단체 전체를 뒤흔들었고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무엇인지 재조명해보게 되었습니다. 클레이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었어요. 클레이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그가 잃은 것 때문에 자살한 겁니다. 목표를 상실했고 자신의 공동체에서도 고립된거에요. 아마 가장 비극적인 것은 자존감을 잃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이유를 살폈고, 그의 죽음이 몰고온 후폭풍이 줄어들게 되자 우리는 그 두가지 문제점과 저희 단체의 처음 문제를 되새기며 우리가 전역 장병의 도움을 받는 재해 대응 단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지요. 저희는 성공도 했고 저희가 재난 대응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클레이가 죽고 난 후에 저희는 초점을 바꿨어요.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재난 대응을 방편으로 하는 전역 장병에 대한 봉사 단체로 바꿔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여기 계신 많은 청중들께서는 중요한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저희가 그런 목표를 주고 공동체에 대한 감각과 자존감을 전역 장병들에게 불어 넣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터스카루사와 조플린의 토네이도와 그 후에 허리케인 아이린은 저희에게 그런걸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잠시동안 생각해보세요. 18세 짜리 소년이 미조리주 캔사스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군에 들어갔고, 군대는 그에게 총을 쥐어 줬지요. 그리고는 이라크로 보냈어요. 그는 매일 임무라는 줄타기를 한겁니다. 그 임누는 그가 고향에 남기도 온 가족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죠. 그게 그 친구를 살아있도록 하는 힘이었어요. 그것이 그가 속했던 마을의 안정을 위한 일이었죠.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던거죠. 그런데 고향인 미조리주의 캔사스에 돌아온 후, 그는 대학에 갔을 수도 있고, 직장을 잡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 전과 같이 똑같은 목표 의식을 갖지 못했던 겁니다. 그에게 전기톱을 쥐어주고 토네이도가 지나간 미조리주의 조플린으로 보냈다면 그는 목표 의식을 다시 가졌을 겁니다. 되돌아가서, 그 18살 소년은 미조리 캔사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고 군대는 그에게 총을 쥐어주고는 이라크로 보낸거지요 . -- 매일 매일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같은 눈길을 마주합니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그의 뒤에는 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죠. 그들은 같은 모래바닥에서 잠잤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피흘렸죠. 그리고는 고향인 미조리의 캔사스시로 갑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군복을 벗었어요. 이제 그는 그런 공동체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된겁니다. 미조리 조플린에 그런 전역 장병 25명이 간거에요. 그들은 다시 공동체 의식을 가졌습니다. 다시 캔사스시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살 소년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고 군대가 총을 주죠. 그리곤 이라크로 보냅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고 고향의 환영 퍼레이드의 테잎을 끊으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 군복을 벗자 그 사회에서는 더 이상 죤스 하사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는 이제 캔사스시의 데이브였던거죠. 그는 이전과 같은 자존감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토네이도가 지나간 조플린에 가서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고 그의 봉사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한다면, 그들은 이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요? 그게 무슨 의미냐구요? 저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나라에는 지도력에 공백이 있어요. 이 사회에는 부패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어요. 누군가 산업계와 정치에 일해야 하고 고등 교육 기관을 위해서도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서서 이 나라의 리더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이 나라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갈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 세대의 전역 장병들에게 그럴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수)